그런데 이러한 여성의 불안은 성서에도 나타난다. 구약성서 룻기에 보면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이 남편이 죽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들에서 이삭을 줍는 모습이 등장한다. 자비로운 남성 보아스를 만나 보아스는 룻이 남성들에 의해 폭행이나 방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다른 사람의 들에 가지 말고, 자신의 들에서 안전하게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도 더 오래된 구약 시대에 이미 여성들은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가서 일할 수 없는 위험한 현실을 살았던 것이다. 남성의 보호와 도움이 없이는 여성은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여성은 혼자서 마음대로 어디나 가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이런 현실은 신약 성서의 예수의 활동에서도 이어진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께 죄를 묻는 장면이 있다. 간음한 여인이라고 붙잡혀 왔는데, 상대 남성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사정으로 남성이 빠져 나갔는지 혹은 남성이 어떤 방법으로 그 상황을 모면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또한 그 여성을 고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에 대해 논박하는 예수의 대답은 제시되지만, 정작 사건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그 여성의 목소리는 거의 없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는 예수의 묻는 말에 없다 라는 짧은 대답만이 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사건의 핵심 인물이고 피해자인데, 정작 그 핵심 인물인 여성이 어떤 사정으로 그런 환경에 처했는지, 그것이 자의였는지 남자에 의한 강제였는지, 그 상황에서 그 여성 자신은 어떻게 느끼는지 자신의 변론은 무엇인지 등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여성은 법정에서 증언을 할 수도 없었던 당시의 관습 때문이었을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것이 그 여성의 상황이었다. 여성 불안과 죽음의 상황이었다.
구약성서와 신약 성서의 마을의 기록에 이어 그 성서를 읽는 21세기 한국의 대도시 서울의 나에게까지, 여성 불안 마을 혹은 여성 불안 도시는 계속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억압은 성서의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 성서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 즉 사회의 눌린 자,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나는 여성이면서 불안이 감도는 익명의 대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절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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