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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극복 2

루디아난 2019. 11. 3. 23:04

중학교 1학년 때 여자 담임 선생님께서 출산을 하셔서 한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으셨다. 그 선생님은 나를 매우 예뻐해 주셨었다. 그런데 나는 여자였으므로, 앞으로 내게 있을 수 있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엄청난 고통, 통증이라고 들은 것과, 옛날에는 아이를 낳다가 여자들이 많이 죽기도 했다는 사실 등을 떠올리며, 혼자 괜히 걱정을 하곤 했다.

이제 나이 들어 생각해 보면 나는 대상관계 이론가들이 말하는 어린 영아, 인간의 원초적인 멸절 불안을 느꼈던 것 같다. 나 자신이 해를 입거나, 공격을 받고 멸절되어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그런 원초적인 불안... 낙태를 할 때, 어찌 보면 세포 덩어리와도 같은 태아조차도 수술 기구가 다가 오면 그것을 피해 움츠린다고 하지 않는가... 혹은 나는 무조건적이 삶, 생명의 기쁨, 사랑,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몰랐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나의 집 마루에 누워서 옆 집인 2층집의 방 안을 상상하곤 했다. 우리집보다 아마 부자라고 느껴서인지, 그 집 2층 방을 마치 내 방이라면 어떻게 꾸미고 싶다 하고 생각했었다. 나는 집, 가정에 대한 이상화된 생각, 혹은 집착 같은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시를 썼었다. 국어 선생님께서 나의 시를 높게 평가하셨는지, 학생들 앞에서 나와 칠판에 나의 시를 써서 설명을 해보라고 하셨던 것 같다. 아마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나오는 4월은 잔인한 달, 등을 언급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나는 정신적으로 조숙했다. 나의 한 친구는 내가 늘 다른 친구들보다 정신적으로 한 단계 위였다고 말했었다. 나는 혼자 책 읽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글을 쓰고 하는 것들이 더 좋고 편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나 보다.

대학에 가서는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와 학생 운동권의 영향을 받은 나는 갈등하고 불화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학생회 활동을 하고 운동권 쪽의 세미나 등에 참여했다. 나는 용감하고 독립적이며 능력 있는 젊은이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나는 불안했다. 아버지와 대화가 잘 안되어서, 어머니가 무력해서... 내가 편안함, 안정감을 느끼는 대상을 찾을 수 없어서 나는 불안했다.

되 돌이켜 보면, 예전에 대학 때 학생회 활동을 할 때도 그랬다.. 공무원이셨고 보수적이셨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나는 숨어서 활동을 했다. 드러내고 말하지 못했다. 학생회 활동 모임 엠티, 운동권 서적들 읽고 토론하는 모임들, 친구 동료들과의 편안한 뒷풀이 자리. 이 모든 것들을 나는 숨겼다 그리고 가슴 졸이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아버지는 강성이셨다. 완고하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도 굽히지 않았다. 굽히는 척하고, 말을 하거나 토를 달지는 못했지만...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그래도 내 주장, 내 뜻대로 했다. 그러니 나의 젊은 날들은 찬란하거나 빛나지 못했고 그늘졌으며 어두웠고 우울했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그런 상태로 대학원엘 갔다.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잠을 잘 못자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자고 싶은데 정작 누우면 머리가 맑아지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거였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니, 낮에 피곤하여 눈을 감고 있거나, 활발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대학원 동료들, 선후배들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무엇인가 진리 탐구, , 공부, 리포트 제출 등등 압박감이 앞섰다. 불안했고...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는가 등등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수업의 발제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기도 했었다.